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미술 (문단 편집) === 회화 === 명의 회화 경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궁정화풍 정통으로 송대의 화풍이 복고되는 형식이었으나 명의 궁정 미술 정책의 한계로 인하여 크게 꽃피우지는 못하였다. 명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한림원의 부속 기구로 화원을 두었으나 그 영향력은 이전시대보다 떨어졌다. 화원 화가들은 명의 조정 내에서 무관의 관직을 받았으나 실제 운영에 있어서 환관의 지배를 받았으며 명의 역대 황제들 또한 선덕제(재위 1426 ~ 1435)와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예술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이런 무관심과 다르게 명의 궁정은 예술의 표현에 있어서 엄격한 제한을 가했는데 이후에 설명할 대진((1388 ~ 1452) 같은 인물은 어부의 옷에 관복을 의미하는 붉은 색을 칠했다는 이유로 쫓겨날 정도였다. 형식에 있어서는 북송의 이곽파와 남송의 마하파를 절충하는 양식을 보았는데 그 이전의 원나라의 문인화가들이 송나라의 양식을 의도적으로 배격하고 더 복고적인 양식으로 회귀한 것과비교가 되는 행보라고 볼 수 있다. || [[파일:오위, 어락도, 프리어미술관.jpg]] || 오위, <어락도>, 15세기, 프리어미술관 궁정화풍과 다른 전통은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볼 수 있는 민간화가의 전통인데 명대에 절파로 대표되는 화풍이 바로 그것이다. 절파의 창시자는 절강성 항주 출신의 대진으로 앞서 언급했듯 본디 궁정화가였다. 하지만 화원에서 물러나 항주로 돌아온 이후에도 미술 활동을 계속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독특한 화풍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형성된 절파는 그 시원이 명대의 궁정화풍에 있었기에 송대의 미술 전통을 따랐으나 그 형식에 있어서 명대의 궁정화풍보다 더 자유로운 점이 특징이다. 강렬한 먹의 대비와 절벽을 화면의 앞에 배치시켜 대칭적 구도를 깨는 것 등이 절파 화풍을 상징하는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주된 활동지는 항주 일대로 문인화 전통이 강했던 소주 출신의 화가들과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자유로운 화풍을 추구했던 절파였지만 후기에 가서는 문인화가들 특히 동기창과 같은 화가들에게 비판받게 되며 심하게는 광태사학파(여기서 광은 미칠 광에 쓰이는 그 광(狂)이다)라고 까지 비판받는다. 실제로 동기창이 활동하던 시기가 되면 직업화는 지나치게 불필요한 요소들이 많아져 번잡해지고 형식에 있어서도 대진과 오위의 양식을 답습하는 등의 양태를 보이게 된다. 한 마디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절파는 이후 청나라 시대에 들어와서 문인화에게 화단의 주요 자리를 내주게 된다. || [[파일:심주, 중추상월도, 보스턴미술관.jpg]] || 심주, <중추상월도>, 15세기, 보스턴미술관 마지막으로 명대의 회화를 대표하는 화풍은 문인화풍으로 특징지어지며 이후 중국의 주류 미술 중 하나로 자리잡는 오파 - 송강파의 미술이다. 원대 이후 중국의 강남 지방은 문화, 경제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는데 그러한 경향은 명대에 들어서 심화되었다. 최초의 강남 통일 정권이었던 명나라에서 강남 지식인, 화가들의 영향력은 이후의 미술 사조에서 중국적 전통을 규정지어 버릴 정도로 막강했다. 번창하는 강남의 문화, 예술계에서 특히 오현 지방은 오파 양식을 형성한 심주(1427 ~ 1500)와 그의 제자인 문징명(1470 ~ 1559)의 고향으로서 명대 문인화 예술 전통의 중심지로 인식되었다. 이곳에서 형성된 오파는 기본적으로 원말 4대가라 불리는 황공망, 예찬, 왕몽, 오진의 화풍을 따랐으며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화폭에 담아내는데 능했다. 이들은 기법에 있어서는 원말 4대가의 화풍을 따르는 등 복고적인 성격을 띄었는데 이러한 성격은 이미 원대에 조맹부의 글에서도 나타나나 이 시기에 들어서 확실하게 자리잡으며 이후 동기창이 남북종회화론을 주창하면서 일종의 수련 방법으로까지 정착된다. 오파를 대표하는 화가들은 흔히 '오문사대가'로 불리는 심주, 문징명, 당인, 구영이다. 하지만 이들 중 당인과 구영은 엄밀한 의미에서 문인화라 보기가 힘든 측면이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문인화의 특징 중 하나인 자기 탐구를 위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닌 상업적 이윤 추구를 위해 문인화 화풍을 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인과 구영은 완벽한 오파의 개념에는 들어맞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 성립된 오파의 문인화 전통이 하나의 규범으로 정착된 것은 동기창으로 대표되는 송강파의 회화에서부터 였다. 송강파의 화풍에서 중요한 것은 동기창이라는 인물로 사실상 그의 미술 이론이 이후 전근대의 중국 회화를 규정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동기창은 선종에서 유래한 남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일종의 문인화 계보도를 만들었는데 이러한 계보도가 이후 문인화의 정석으로 굳어진다. 동기창의 미술 이론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이론의 여지가 많지만 문인화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를 시도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구분이 효용가치가 있다는 점에서 중국 회화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고 봐야 한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문인화의 전통에 한정한 이야기다. 청대에 들어 문인화와 직업화가 모호해지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인화 바깥의 영역에도 많은 종류의 회화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명청교체기와 청대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서양화 기법을 들 수 있겠다. 송강파가 중국 회화에 기여한 또 다른 점은 수묵화를 문인화와 연결시켰다는 점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수묵화라고 하면 선비들이 사랑채에 앉아서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러한 이미지가 일반 사람들에게 정착된 것에는 동기창의 공이 컸다. 짧게 요약해보면 동기창은 수묵산수화를 문인화의 대표적인 장르로 규정 짓고 채색 산수화를 궁정, 직업화와 결부시켜 이해함으로서 오늘날의 동양화 관념을 형성하는데 일정부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 [[파일:31fcbb004a6be5986afd01378bf8daf4.jpg]] || 이러한 전통적인 양식 구분 이외에도 명대에는 서구에서 들어온 새로운 회화 기법으로 말미암아 화풍에 있어 변화가 일어난다. 마태오 리치로 대표되는 예수회 선교사들은 그들의 포교 전략으로 지식인들을 서구의 지적 유산으로 회유하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서구의 환영적인 미술품을 보여주는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예수회 선교사들이 가져온 그림은 주로 판화 그림이었고 주제에 있어서는 성경의 내용이 많았으나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그러한 그림은 어떤 종교적인 목적 보다는 호기심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강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